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유럽 혁명 (문단 편집) === [[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]] 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159ji.jpg|width=100%]]}}}|| || {{{#000,#fff 옥상 위에서 파괴된 도시를 바라보는 [[크로아티아군]] 병사. [[유고슬라비아 전쟁]] 당시 찍힌 사진이다.}}} || 루마니아가 [[유혈사태]]였다면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루마니아보다도 훨씬 심각한 [[내전]]이 발발했다. 이는 유고슬라비아 해체 자체가 민주화 요구 때문이라기보다는 지도층부터가 각 공화국 별로 분열 양상을 보였고 [[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|집권당]]이라고 해도 사실상 별개의 정당으로 움직이다시피 했으며 이 와중에 중앙정부와 통합파는 [[내셔널리즘]] 세력에 맞설 뚜렷한 리더십이 없는 상태에서 재정긴축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힘을 잃으면서 내셔널리즘 세력에게 끌려나갔기 때문이었다. [[요시프 브로즈 티토]]의 지도 아래 [[동유럽]] 공산권에서 [[바르샤바 조약 기구]]의 영향력에 있지 않았던 유고슬라비아는 [[1980년]] 티토 사후 외채 문제를 겪게 되었고 해결책을 놓고 발흥하던 각 민족별 [[민족주의]]로 인한 분열 위기가 서서히 고조되고 있었다. 초기에는 일단 단합된 모습을 보이던 각 공화국의 지도층들도 지속적인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긴축적인 경제정책을 펼쳤지만 물가 상승을 억제하지 못하면서 집권 [[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]]이 인기를 잃어 갔다. 그러면서 각 공화국의 공산당 별로 각자도생을 도모했고 이 과정에서 내셔널리즘에 편승했다. 당시 내셔널리즘을 내세워서 입지를 단단히 굳힌 지도자로는 [[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|세르비아]]의 [[슬로보단 밀로셰비치]]와 [[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|슬로베니아]]의 [[밀란 쿠찬]]이 있었고 이외에도 [[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|마케도니아]][* 현 [[북마케도니아]]]의 [[키로 글리고로프]],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|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]]의 [[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]], [[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|크로아티아]]의 [[프라뇨 투지만]] 등이 민족주의를 내세워 세를 넓히고 있었다. 당시의 갈등 구도는 연방의 정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[[세르비아]] 대 경제권을 쥐고 있었던 [[크로아티아]]와 [[슬로베니아]]가 주가 되었다. 특히 [[1988년]]에 세르비아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오른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계 주민의 민심을 얻은 것을 이용하여 시위를 조직해 [[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|몬테네그로]], [[보이보디나]], [[코소보]] 등의 서기장을 강제로 교체하는 데 성공했고[* 이른바 반관료혁명이라고 부른다. 사실 이 사건도 따지고 보면 동유럽 민주화 시위의 단초가 될 만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애초에 자유화와 경제난을 빌미로 타민족을 깔아뭉갰다는 점이나 밀로셰비치가 이후 인종청소 같은 막장 행각을 벌인 탓에 [[영어 위키백과]]의 [[1989년]] 동유럽 혁명 문서에는 빠져 있다.] 유고슬리바아 내 6개 공화국과 2개 자치주 가운데 4개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도 내셔널리즘 세력의 움직임이 더욱 강화되었다. 이렇게 갈등이 커져가던 와중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1990년 1월에 들어 본격적인 자유화 논의가 시작되었다. 그래서 유고슬라비아는 '''[[구성국]] 별로 민주 총선을 시행'''이라는 결정을 했는데 '''이는 매우 심각한 대[[악수(동음이의어)#s-2|악수]]가 되고 말았다.'''[* 참고로 유고슬라비아는 1974년 헌법 개정으로 구성국들이 연방에서 탈퇴할 수 있는 조항이 신설됐다. 한마디로 연방 구성국들이 합법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던 셈. 특히 당시 [[석유 파동]]과 외채 상환 문제 등에 의한 경제문제가 헌법 개정을 촉발시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[[1980년대]] 말 상황이 [[1970년대]] 초 상황과 판박이나 다름없다.] 구성국 별 총선에서 [[세르비아]]와 [[몬테네그로]]를 제외하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10% 내외의 득표로 처참히 몰락했다. 그리고 그 빈자리는 죄다 '''[[민족주의]] 정당들이 차지한 것이다'''. [[슬로베니아]]의 [[밀란 쿠찬]]([[사회민주당(슬로베니아)|슬로베니아 사회민주당]][* [[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]]에서 [[사회민주주의]]를 따르는 슬로베니아 민족주의자들이 [[분당(정치)|분당]]하여 창당되었다.]), [[크로아티아]]의 [[프라뇨 투지만]]([[크로아티아 민주연합]][* 여기는 아예 크로아티아 사회당이 5%로 몰락하고 민주 크로아티아가 60% 이상을 차지했다. 나머지는 나중에 [[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]]으로 독립을 선언하는 [[세르비아 사회당]]이 차지했다.]) 등등 모조리 내셔널리즘 성향의 정당들이 정권을 잡았다. 하지만 무엇보다도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]]이 제일 가관이었는데 [[보슈냐크인]]의 [[민주행동당(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)|민주행동당]], [[세르비아인]]의 [[세르비아 민주당(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)|세르비아 민주당]], [[크로아티아인]]의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|크로아티아 연합당]] 등 민족주의 정당들이 득세했고 하필이면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였다. 그러자 보스니아의 내셔널리즘 세력들은 '''자기네가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난리 부르스를 치면서 보스니아는 [[1990년]] [[4월]] 민주 총선 이후 [[1992년]] [[3월 1일]] 독립 선언 직전까지 2년동안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는 [[무정부]] 상태에 빠졌다'''. [[세르비아]]는 [[슬로보단 밀로셰비치]]의 [[세르비아 사회당]]이 65%를 차지하였다. 자유화 논의와 더불어서 이미 발흥하기 시작했던 내셔널리즘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[[유고슬라비아]]의 분열이라는 뇌관을 건드리기 시작했다. 4월에 실시된 [[슬로베니아]]와 [[크로아티아]] 공화국의 총선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이는 11월에 실시된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]]와 [[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|마케도니아]]에서도 마찬가지였고, [[세르비아]] 총선도 민족주의자들이 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것은 매한가지였다. 물론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이는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.[* 밀로반 질라스 전 부통령 등 일부 전직 지도층 인사들이 연방의 통일을 주장하며 각 공화국들이 분열 시도를 자제하고 평화적으로 협상할 것을 호소했으나 허사였다.] 비슷한 시기에 [[초인플레이션]]을 잡으려고 시행한 경제개혁의 여파로 많은 기업들이 [[파산]]하고 각 공화국의 대통령들은 중앙정부의 경제정책을 따르지 않게 되며 물가 상승은 재개되었고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. 이에 따라 각 공화국간 독립 요구가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[[1991년]]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으로부터 이탈 및 분리독립을 선언하면서 지옥의 문이 열리고 말았다. 이후의 전개는 [[유고슬라비아 전쟁]] 참고. 내전이라는 대규모 유혈 참극으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 유고슬라비아는 7개국으로 분리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때의 충돌이 서로에게 뿌리 깊은 상처와 불신을 남겼다. 현재는 [[코소보]]를 제외한 구 구성국들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코소보는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 사이에서 간헐적인 충돌이 벌어지고 있고 국제사회에서도 코소보의 독립국 인정 여부를 두고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